조선왕조 중 가장 불운한 생을 살다 간 왕을 꼽는다면 단연 단종을 꼽을 수 있다.
영월을 방문했을 때 곳곳에 단종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다는 청령포, 사약을 받았다는 관풍헌을 둘러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단종이라는 홍위의 사망 이후 지어진 왕호가 아닌 홍위의 일생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단종의 짧은 고단한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홍위의 아버지인 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세자빈 권씨마저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를 나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홍위는 세종의 후궁인 소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혜빈양씨는 홍위의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자라난 홍위는 총명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있고 세자 또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세종은 자신의 혈기왕성한 아들들을 생각하며 홍위의 앞날을 걱정해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앞날을 부탁할 정도였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마저 오래 살지 못하고 2년 3개월만에 죽자 홍위는 나이 12세에 왕위에 오른다. 태어날 때 어머니를 잃고 10살에 든든한 버팀목인 할아버지를 잃고 12살 어린나이에 아버지마저 잃었을 12살의 홍위는 왕위에 대한 기대보다는 혈혈단신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미성년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받아야 하나 주변에 수렴청정을 할만한 어른들조차 없던 단종은 의정부와 육조가 정사를 도맡아 했으며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에 이른다. 이또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삶이 스스로의 삶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런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왕족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하고 점점 왕권을 위협하게 된다. 특히 수양과 안평의 세력 경쟁이 치열했으며 1453년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영의정에 오르고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한다. 왕권을 장악한 수양은 왕의 측근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면서 단종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 들어갔으며 이를 지켜보던 단종은 위험을 느껴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간다.
이후 상왕복위 사건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무신들이 사형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렇게 유배된 곳이 자연감옥이라 이름 지어진 청령포이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단종은 이곳을 육지고도라고 표현하였다고 전한다. 스스로 육지고도라고 표현했던 청령포에서 단지 16세 어린 단종은 매일매일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청령포의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관음송을 만날 수 있다. 이 관음송은 단종이 고단한 몸을 기대 쉬었다고 한다. 또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에 오르면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서강과 멀리 첩첩산중 험난한 산줄기를 바라보며 단종이 느꼈을 슬픔을 짐작해 본다. 유배된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겨 물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유배된 기간에도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 되었고 한 달 뒤 사약을 받아 16세의 나이로 사사 되었다.
홍위는 죽은 후에도 편하게 장례가 치러지지 못하였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고 하나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 영월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다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몰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묻었다. 엄흥도 정여각에 의하면 엄흥도가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겨울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 암장하였다.
이후 중종 11년 노산묘를 찾아 봉분이 갖추어졌고 중종 36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제사를 지냈으며 현종 14년 묘의 일부 석물을 세웠다. 세상을 떠난 지241년이 지난 숙종 24년에 왕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 릉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